프로젝트를 디깅하다

사람들은 [여기]에서 솔직할 수 있다.

김소울 2024. 1. 4. 10:00

이태원 해방촌 카페 '타자기'에 다녀왔다. 먼 과거에 사진 동아리 조원이 추천해 준 카페였는데 처음 방문했을 때는 사람이 너무 많아서 실패하고, 두 번째 방문에 겨우 성공했다. 카페 인테리어는 '타자기'에 걸맞게 타자기와 관련된 장식들이 놓여져 있어 카페의 콘셉트에 대한 소비자의 몰입감을 높여준다. 그리고 카페 픽업대 옆에 작은 책장이 있는데, 그곳에는 타자기 질문 노트(Tajagi question note)가 잔뜩 꽂혀있는 것을 볼 수 있다.

 

처음에는 단순한 방명록인가 싶었는데, 열어보니 각 노트마다 표지에 다른 질문이 적혀 있었다. 사장님께 여쭤보니 타자기 질문 노트는 2018년부터 사람들에게 질문을 던지고 그에 대한 답을 사람들이 노트에 적는 방식으로 운영되고 있었다. '누가 이런 노트에 자신의 솔직한 이야기를 적을까?'라고 회의적인 시선으로 노트를 바라보았는데, 정신 차리고 보니 카페에 머무르는 내내 타자기의 노트들을 구경하는 데 시간을 보냈다. 오늘은 이 노트, 왜 매력적일까에 대해 고민해보았다.


질문을 던지는 이 작은 노트가 매력적인 이유

1. 노트 표지가 노을 사진

카페 '타자기'는 노을 명소로 유명하다. 이러한 타자기의 매력을 살려, 노트 디자인도 노을빛 사진을 표지로 구성한 것으로 보인다. 노을이 너무 예쁘게 보이는 날이면, 사람들은 가던 길을 멈추고 노을을 멍하니 바라보거나 찰칵 소리와 함께 노을빛을 자신의 스마트폰에 담는다. 그리고 인스타스토리에도 사람들이 '오늘 노을 너무 예쁘다'라면서 자신들이 촬영한 노을 사진을 공유하기도 한다. 이처럼 노을 사진은 대중의 사랑을 받는 사진이다. 사람들이 지나가다가 한 번은 '이거 뭐야? 예쁘다'라며 관심을 가지고 열어볼 법하다.

 

2. 한 번쯤 고민했을 법한 질문들

타자기 노트들의 질문은 주로 '자기 self' 혹은 '관계 relationship'와 관련되어 있다. 예를 들어, '당신에게 가장 위로가 되었던 순간은 언제인가요?', '당신에게 가장 기억에 남는 처음은 언제인가요?'과 같은 것들이다. 당시 나는 심리학에 관심 있는 20대를 대상으로 연말 질문 엽서를 제작할까 고민하던 찰나에 방문해서 이 노트들을 더욱 흥미롭게 보았다. 질문은 누구나 할 수 있지만, 좋은 질문을 하는 것은 아무나 할 수 없다는 생각에 사로잡혀 있었다. 그래서 카페 '타자기'가 건네는 질문은 무엇인지 살펴보니, 이들은 누구나 고민했을 법한 질문들을 던지고 있었다.

 

평소 사색을 즐겨하던 사람들에게는 '나도 이런 생각했었는데!'라며 반가움에 자신의 이야기를 기록할 수 있고, 바쁘게 살아온 사람들은 타자기가 던지는 질문을 통해 자신에 대해 생각해 보는 의미 있는 시간을 보낼 수 있다. 타자기는 단순히 카페를 넘어서, 사람들에게 생각할 기회와 생각을 나눌 기회를 모두 제공하고 있다. 괜히 마음 한편이 답답할 때, 이 노트에 적힌 질문에 대해 곰곰이 생각하고 자신의 의견을 적어 내려가는 것도 바쁜 현대인들에게 하나의 힐링이 될 수 있다.

 

3. 내 이야기를 하고 싶어 하는 사람들의 선순환

사람들은 내 이야기를 하고 싶은데, 들어줄 곳이 없는 경우도 종종 있다. 특히 AI 우정 관련한 글을 작성했을 때 이야기했듯, 한국인은 다른 사람에게 영향력을 펼치고 싶어하는 경향이 있는 주체성 자기가 강하다. 이러한 상황에서 타자기 노트를 만나면 '나도 한번 적어볼까'하는 마음이 들 수 있다. 그런데 여기서 사람들의 마음을 행동으로 옮기게 하는 선순환이 발견된다. 바로 나보다 앞서 방문한 사람들의 기록을 편하게 볼 수 있다는 점이다.

 

자신의 이야기를 하고 싶지만, 노트가 깨끗하게 비워져 있다. 이러한 경우에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첫 장에 자신의 이야기를 편하게 적어가기 힘들 것이다. 그 이유는 여러 심리학적 요인이 있을 텐데 3가지만 가볍게 이야기해 보자면, 첫 번째는 새로운 노트이다 보니 깔끔하게 적어야 한다는 부담을 느껴서, 내가 혹시 이 노트를 망칠까 봐 걱정하는 것이다(쉽게 말하면 완벽주의 성향이다). 두 번째는 첫 문장을 어떻게 시작해야 할지, 어떤 내용을 포함해야 할지 압박감이 크기 때문일 수 있다. 그리고 세 번째는 자신의 이야기를 익명으로 작성하고 싶지만 첫 번째로 작성하면 같은 공간에 있는 사람들에게 그것이 들킨다는 생각을 하기 때문이다.

 

카페 '타자기'의 노트 中

다행히 타자기의 노트는 이미 누가 열심히 적고 내려간 노트들이다. 작성한 사람의 이름을 닉네임으로 적든, 익명으로 적든 상관없이 나를 안전하게 숨길 수 있다. 그리고 다른 사람들의 이야기를 보면서 나의 생각을 발전시키는 것도 가능하다. 이러한 상황에서 이야기하고 싶은 사람들이 모이면 타자기 노트가 지금처럼 선순환되는 것으로 볼 수 있다.

 

4. 들고 다니기 좋은 크기의 노트

타자기의 노트는 A6였던 걸로 기억한다(기억이 정확하지 않아, A5일 수도 있다). 나는 무엇보다 장기적인 관점에서 노트라면 '보관'이 중요할 것 같다. 사람들이 원하는 분량의 글을 충분히 적을 만하면서, 이동하기도 편한 사이즈도 매력의 중요한 요소이다. 사람들이 자주 들고 책장에서 꺼내는 타자기 노트는 A4 크기보다 작아야 하지만, 메모장처럼 너무 작은 것도 충분한 이야기를 담아내기가 어렵다. 그래서 적절한 노트 크기를 선정한 것도 매력도에 기여했을 법하다.

 

타자기의 노트를 보면서 가장 신기했던 점은 사람들이 꽤 솔직하게 자신의 이야기를 적어둔 부분이었다. 그래서 나는 이 노트를 인간사랑을 못하게 되었을 때, 요즘 사람들이 이야기하는 인류애가 떨어졌을 때 찾아 읽으라고 권하고 싶다. 부정적으로 차올랐던 감정들이 노트를 읽으면서 따스함에 녹아 긍정적으로 바뀌는 경험이 가능하다.

 

 

내가 사람 사는 이야기를 좋아하는 이유, 사람들을 만나면 말하기보다 듣는 것을 좋아하는 이유도 비슷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우리는 혼자일 때보다 여럿이 될 때 더 큰 무언가를 해낼 수 있다. 생각해보지 못한 것을 생각해 볼 수 있고, 알고 있었지만 불명확했던 것들이 다른 사람들을 통해 비교적 명확해지기도 한다.